와엘 샤키 개인전 ‘텔레마치와 다른 이야기들’
![와엘 샤키의 영상 작품 ‘동굴(암스테르담)’(2005). [바라캇 컨템포러리]](https://stg-wimg.heraldcorp.com/news/cms/2025/03/10/news-p.v1.20250310.39aae9189deb4bec9cf128e0e53f6e30_P1.png)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슈퍼마켓. 진열대를 거닐며 쉴 새 없이 경전을 암송하는 한 남자가 카메라를 응시한다. 그는 이집트 태생의 작가 와엘 샤키. 그가 이슬람교 경전인 쿠란의 ‘동굴의 장’을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읊조린다.
그 내용에 귀기울여보니, 박해를 피해 동굴로 숨었던 신실한 청년들이 309년 뒤 잠에서 깨어나 신의 기적을 전했다는 이야기. 소비와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공간에서 흘러나오는 이 신성한 메시지는 이질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전통과 현대, 신앙과 자본이 맞물리는 장면마다 신념이 오늘날의 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변형되고 해석되는지 낯설게 드러내고 있어서다.
이 작품은 서울 종로구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열리는 샤키의 개인전에서 만날 수 있는 ‘동굴(암스테르담)’이다. 이 작품은 작가에게 ‘자화상’ 같은 의미를 지닌다. 1970년대 원유 산업이 부흥하던 시기, 어린 시절의 그는 고향을 떠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살았다. 당시 사우디의 메카에는 베두인족을 비롯한 토착 문화가 남아 있는 한편, 급속한 현대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이처럼 전통과 변화가 맞부딪치는 풍경 속에서 자란 그의 경험이 작품에 깊이 배었다.
![이집트 현대미술 작가 와엘 샤키. [바라캇 컨템포러리]](https://stg-wimg.heraldcorp.com/news/cms/2025/03/10/news-p.v1.20250310.d714873869d84432ae4e1c417a3b2629_P1.jpg)
이집트 현대미술 작가 대표격인 샤키가 2000년대에 작업한 초기 영상 작업을 재조명하는 전시가 서울을 찾았다. 영국의 현대미술 전문지 ‘아트리뷰’(ArtReview)가 해마다 선정하는 ‘세계 미술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에서 지난해 6위를 차지한 그다.
샤키의 최근작들이 음악을 극적으로 활용해 이야기의 흐름과 메시지를 강조했다면, 이번 전시 출품작은 보다 거칠고 투박한 형식을 띤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서로 공존할 수 없어 보이는 세계를 의도적으로 분리해 배치하고, 그 속에 담긴 사회·정치적 의미를 나란히 비교하려는 작가의 본질적인 태도는 여전하다.
![와엘 샤키의 영상 작품 ‘텔레마치 사다트’(2007). [바라캇 컨템포러리]](https://stg-wimg.heraldcorp.com/news/cms/2025/03/10/news-p.v1.20250310.e644e7e245c346c8989ab22959f33684_P1.jpg)
![와엘 샤키의 영상 작품 ‘텔레마치 사다트’(2007). [바라캇 컨템포러리]](https://stg-wimg.heraldcorp.com/news/cms/2025/03/10/news-p.v1.20250310.81072f822a184652b5240133fd76fe46_P1.png)
전시작 중 하나인 ‘텔레마치 사다트’가 대표적이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전 대통령의 암살 사건과 그 이후 치러진 장례식을 재현했다. 다만 군용 차량 대신 당나귀와 낙타가 등장하고, 이 사건을 모르는 아이들이 연기를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적 사건이 어떻게 축약되거나 왜곡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를 반영하듯 작품명 ‘텔레마치’도 작가가 어린 시절 시청한 TV 버라이어티 쇼에서 따왔다. 서독에서 제작된 이 프로그램은 여러 국가로 수출됐고, 사우디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원래 어린이 대상의 오락 프로그램이었던 텔레마치는 게임과 경쟁을 통해 단순한 서사를 연출하는 방식이 특징이었다.
이처럼 샤키는 역사적 서술을 재해석해 종교, 국가 정체성, 미술 등 개념을 복잡하게 얽어내는 통·번역사를 자처한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역사는 인간의 창작물”이라며 “역사 자체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것도 역사의 일부고, 기록된 역사를 100% 확신할 수 없는 인간의 무지함 역시 역사의 일부”라고 말했다.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 이집트관에서 상영된 와엘 샤키의 영상 작품 ‘드라마, 1882’(2024). [바라캇 컨템포러리]](https://stg-wimg.heraldcorp.com/news/cms/2025/03/10/news-p.v1.20250310.007f9987321146b1b826f82d960e71cb_P1.jpeg)
한편 작가는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 이집트관에서 선보인 ‘드라마, 1882’로 긴 대기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해당 작품은 제국 통치에 저항한 이집트의 우라비 반란을 소재로 한 뮤지컬극으로, 오는 5월부터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도 상영된다. ▶관련기사 [영상] 외국인인가, 점령자인가…동화 같은 이집트관의 난센스 [베니스 비엔날레 2024]
지난달까지는 대구미술관에서 한국의 판소리를 주제로 한 세 가지 사랑 이야기를 다룬 신작을 선보이기도 했다. ▶관련기사 비엔날레 휩쓴 이집트 작가, 판소리에 꽂혔다?! [요즘 전시]
dsu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