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개봉 ‘라스트 마일’…日 박스오피스 1위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인 현대인

‘싸고 빠른’ 배송 내건 기업 거부할 수 있나

영화 ‘라스트 마일’은 미국계 거대 이커머스 기업 ‘데일리 패스트’의 일본 관동지부 물류센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영화 스틸컷
영화 ‘라스트 마일’은 미국계 거대 이커머스 기업 ‘데일리 패스트’의 일본 관동지부 물류센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영화 스틸컷

[헤럴드경제=이민경 기자] 온라인으로 물건을 주문한지 하루 안돼 ‘딩동~고객님 택배왔습니다’ 문자와 함께 현관 앞에 물건이 놓여진다. 이토록 손쉬운 사냥에 많은 현대인들은 택배 언박싱을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순간으로 꼽는다. 그런데 기쁘게 받아든 택배에서 폭탄이 터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29일 개봉하는 일본 영화 ‘라스트 마일’ 미국계 이커머스 회사 ‘데일리 패스트’ 일본 본부와 도쿄 등 관동 지역의 주문을 총괄하는 물류센터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폭탄 테러 사건을 다룬다. 범죄 스릴러의 외양을 하고 ‘인간 생명 경시’·‘노동 경시’와 같은 사회 고발 메시지가 작품 전반에 짙게 깔렸다.

누군가 검정 마커로 데일리 패스트 관동지부 물류센터 관물대에 휘갈겨 써놓은 ‘2.7m/s’(초속 2.7m). 그 옆에는 차례로 ‘70kg’과 ‘0’(zero)가 적혔다. 알 수 없는 이 숫자들의 나열을 이제껏 아무도 지우지 않았다. 그 사물함은 모두가 피한다.

아침시간 도시 외곽에 위치한 물류센터로 수 천 명의 파견직들이 통근버스를 타고 출근한다. 이들에겐 ‘블루 패스’로 불리는 사원증이 주어진다. 3억 여개의 물품을 입고, 진열, 집품, 출고하는 육체노동을 담당한다. 관리직과 사무직 직원 십 수명은 ‘화이트 패스’ 사원증을 목에 건다. 그중에서도 후쿠오카 지부에서 오늘 새로 관동지부 센터장으로 발령이 난 ‘후나토 엘레나’(미츠시마 히카리 분)는 하이힐 부츠에 커다란 링 귀고리, 화려한 손목 뱅글을 찼다. 통근버스는 타지 않는다. 혼자 택시를 타고 앞질러 지나간다.

엘레나를 마중나온 직속 부하 ‘나시모토 코우’(오카다 마사키)는 ‘엘레나’라는 미국물 먹은 이름과 화려한 복장에 다소 당황하고 “센터장님”이라고 내내 딱딱하게 부른다. 엘레나의 출근 첫날은 11월 유통업계 최대 대목인 ‘블랙 프라이데이’ 전날이다. 쏟아지는 주문량에 물류센터는 바쁘게 돌아가고, 엘레나와 코우는 꼭대기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로 공정 작업속도가 ‘원활’ ‘지연’ ‘경고’ 중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모니터링한다.

한편 도시에서는 ‘데일리 패스트’와 사실상 독점 계약을 한 택배업체 ‘양 익스프레스’의 기사들이 바쁘게 배송건수를 올리고 있다. 거대 운송 시스템의 마지막 단계, 즉 ‘라스트 마일’을 책임지는 기사들은 택배 한 건을 배송하면 150엔을 손에 쥔다. 70대 노인 택배기사는 함께 2인1조로 일하던 ‘얏짱’이 심장마비로 죽자 백수로 놀고있는 아들을 데리고 다니며 일을 가르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1시간 동안 점심 먹으면 안된다. 얏짱은 10분만에 도시락 먹고 하루에 200건 배송해서 그 해 최우수 사원이 됐다”고 채근한다. 아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러다 심장마비로 얏짱이 죽어서 제가 왔죠”라고 대꾸한다.

관동지부 센터장 ‘후나토 엘레나’(미츠시마 히카리 분. 오른쪽)와 매니저 ‘나시모토 코우’(오카다 마사키)의 모습. 영화 스틸컷
관동지부 센터장 ‘후나토 엘레나’(미츠시마 히카리 분. 오른쪽)와 매니저 ‘나시모토 코우’(오카다 마사키)의 모습. 영화 스틸컷

저녁시간, 양 익스프레스 소속의 또다른 한 택배기사가 배달한 물건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난다. 물건을 받은 수령자는 즉사, 새까맣게 탄화해버려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됐다. 형사들이 데일리 패스트 관동지부 물류센터에 들이닥친다. 발령 첫날부터 엘레나는 ‘야근각’이다.

일본의 유능한 경찰들과 엘레나와 코우 등 데일리패스트 관리직들이 각각 나름의 추리와 수사를 해나간다. 어떻게 이 완벽하게 짜여진 공정의 물류센터에서 폭탄이 섞여 들어가 고객이 ‘언박싱’할 때서야 터지게 되는지 접근해간다.

‘2.7m/s’의 숫자에 그 비밀이 있다. 5년 전 블랙프라이데이 전날 꼭대기 사무실에서 몸을 던져 가장 아래층 컨베이어벨트로 떨어진 한 사무직 남자. 머리통이 깨졌지만 바로 죽지도 못하고 병원에 실려가 며칠 뒤 뇌사 판정을 받았다. 그 남자가 관물대에 컨베이어벨트의 속도 ‘초속 2.7m’와 물품 제한 하중인 ‘70kg’, 그리고 ‘무(無)’를 의미하는 숫자 ‘0’을 적었다.

업무 스트레스에 못이겨 스스로 몸을 던진 이 남자의 상관은 현재 데일리 패스트 일본 본부장 ‘이가라시 도겐’(딘 후지오카)이었다. 도겐은 당시 떨어진 부하의 몸뚱이를 급히 컨베이어벨트에서 ‘치우고’ 다시 물건을 출고하라 생산직들을 채근했다. 그렇게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회사에 손실을 입히지 않는 근성을 인정받아 승진하게 됐다.

연쇄 폭탄 테러의 범인은 누구일까. 영화 스틸컷
연쇄 폭탄 테러의 범인은 누구일까. 영화 스틸컷

식물인간이 된 남자가 보낸 사신(死神)이라도 온 것일까. 그날 밤 이후 사흘간 도쿄를 비롯해 가정집, 오피스, 쇼핑몰 등 일본 시민의 일상 공간에서 연속적으로 데일리 패스트 박스 폭탄이 터지고 사람들이 큰 부상을 입는다. 어쩌면 경력증명서가 모두 거짓인 엘레나가 내부의 범인일 수도 있다. 죽은 남자의 옛 연인이 엘레나가 되어 위장 잠입한 것일까. 영화는 추리에 추리를 거듭한다.

다행히 범인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지목하며, 영화는 닫힌 결말을 선택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다지 변한 바가 없다. 투신한 남자의 비밀이 무엇인지 밝혀져도 소비자들은 오늘도 ‘최저가’, ‘총알배송’을 내건 ‘데일리 패스트’에 충성한다. 10분 만에 도시락을 흡입하고 하루 200건씩 택배를 돌려야 하는 70대 노인과 아들은 건당 150엔에서 200엔으로 약소한 임금인상을 얻어냈다. ‘소비자 중심주의’를 내건 기업은 오늘도 ‘노동자’를 연료삼아 돌아간다. 노동자이면서 소비자인 현대인의 아비투스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아 그저 씁쓸하게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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